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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장 역사교실 제2부 ① 혜음원

입력 : 2016-07-07 11:14:00
수정 : 0000-00-00 00:00:00

이번 호부터 정헌호 향토사학자의 ‘내고장역사교실 제2부’가 연재됩니다.

  

남한 유일의 고려 행궁, 혜음원

●문화재 이름: 파주 혜음원지(사적 제464호)

 

고양시 벽제에서 파주 광탄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혜음령이라고 한다. 혜음령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혜음사라는 절과 혜음원이라는 숙박시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혜음령은 고려 시대에 개경(오늘날 개성)에서 남경(오늘날 서울)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남쪽 사람들이 수도인 개경으로 올라오든지, 반대로 위에서 내려가는 사람들이 꼭 거쳐 가야 했다. 하지만 고개가 높고 숲이 깊어서 쉽게 넘지 못했다.

 

혜음원지 발굴 전경(문화재청):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134-1)
 

호랑이 떼가 출몰하던 혜음령

“여보게, 호랑이 때문에 저 고개를 넘기가 쉽지 않네.”

“그러게 말일세. 지난 달에는 세 명씩이나 호랑이한테 목숨을 잃었다더군.”

 

혜음령 고개에서는 호랑이가 떼로 몰려다니면서 사람들을 해치곤 하였다. 더구나 산적들이 몰래 숨어 있다가 고개를 넘나드는 행인들의 봇짐을 털거나 목숨을 해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1년에 수백 명이 목숨을 잃는 고개였다.

 

소천의 노력으로 안전해진 혜음령

고려 예종 때 임금의 명령을 받은 소천이라는 하급 관리가 남쪽 지역을 순시하고 돌아와 아뢰었다.

 

“폐하, 봉성현(파주) 남쪽 20리쯤에 고개가 하나 있는데 호랑이와 산적 때문에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목숨을 내걸고 다녀야 합니다. ”

“어떻게 하면 폐해를 제거하고 여행자를 보호할 수 있겠느냐?”

“폐하, 나라의 재정도 축내지 않고, 힘없는 백성을 동원하지 않으면서 일을 마칠 수 있는 계책이 있습니다.”

 

소천은 임금의 허락을 받은 뒤 묘향산의 한 사찰에 가서 딱한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그 절의 주지와 승려들이 소천을 기꺼이 돕고자 했다. 재원과 인력을 마련한 소천은 2년 만에 고개 언저리에 법당과 함께 숙박시설을 갖춘 큰 사찰을 지었다.

 

“여보게들, 임금께서 머무를 수 있게 별원(別院)을 짓는 것이 어떤가?”

“좋습니다. 힘을 보태겠습니다.”

 

사찰을 완성한 소천과 승려들은 임금이 거처할 수 있는 행궁까지 마련하였다. 그 후 고려 인종이 즉위하여 그 사찰 이름을 혜음사(惠陰寺)라 하였다. 사찰 이름이 혜음사가 되면서 숙박시설도 혜음원이 되었다.

 

고려의 재상 김부식은 혜음사를 본 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깊은 숲속이 깨끗한 집으로 변하였고, 무섭던 길이 평탄한 길이 되었으니, 그 이익이 또한 넓지 아니한가? 아름답다고 화려하여 볼만하구나!” 김부식은 혜음사에 대한 감탄과 함께 재정을 아껴서 큰 사찰과 행궁을 완성한 소천과 승려들을 칭찬하였고, 「혜음사신창기」라는 기록도 남겼다.

 

남한 유일의 고려 행궁지

그동안 혜음원에 대한 김부식의 기록만 전할 뿐 위치는 오랫동안 알 수 없었다. 1999년에 비로소 주민 제보에 의해 혜음사의 위치가 확인되었다. ‘혜음원(惠蔭院)’이라 적힌 암막새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발굴 결과 동서 약 104m, 남북 약 106m에 걸쳐 9단으로 조성된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건물터에서는 금동여래상, 찻잔 등과 함께 많은 양의 기와와 고려청자가 발견되었다.

 

▲혜음원지 출토 기와(문화재청): 惠蔭院(혜음원)이라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파주 혜음원지 출토 고려 청자(문화재청)134-1)
 

혜음원지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고려 행궁지로서 사적 제464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행궁의 규모가 궁금하다면 시간 날 때 광탄으로 나들이를 떠나 보자. 

 

 

 

글 정헌호(역사교육 전문가)

 

 

 

#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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